정신 에너지의 움직임
정신 에너지의 전진과 퇴행은 정신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전진은 당사자의 심리학적 적용을 진보시키는 매일매일의 경험이다. 심리학적 진보를 완전히 달성하는 듯이 보이는 인격도 있지만 당사자의 의식적 행동과 실제 정신적 적응을 착각하기 쉽다.
환경과 경험은 쉼 없이 달라지기 때문에 인간의 전진은 연속적 과정이며 결코 완성될 수 없다. 리비도의 전진은 환경조건의 요청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심적 기능을 발휘하는 소질에 따라 한 세계와 만난다. 처음부터 특정한 지향이 있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 정신이 향한다. 이 기능의 일면성이 전진하다 지나치게 지배적이 된다.
지나치게 강해지면 그 기능은 가능한 한 모든 경험과 정신에너지를 끌어당길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이 기능으로는 적응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기능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새로운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 감정이 지배적 기능일 때 생각의 지향이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이 경우 감정과 태도는 힘이 없어지고 그 기능의 정신 에너지의 전진은 정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전까지 있던 안전성과 확실성이 붕괴되고 그 뒤에 정신적 가치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당사자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각종 주관적 내용과 반응이 쌓임으로써 정신은 긴장 상태가 된다.
리비도란?
정신 에너지는 인격이 일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에너지를 말한 다. 융은 이 에너지를 나타내기 위해 리비도라는 말도 썼는데 프로이트의 리비도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융은 프로이트처럼, 리비도를 성적 에너지에 한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두 사람 이론의 본질적 차이 중 하나다. 융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리비도는 욕망, 허기짐, 갈증, 성적 욕구 및 정서이다. 의식에서 리비도는 노력하기, 소망하기 바라기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물리 에너지처럼 정신 에너지도 하나의 형식이지만 공식에 의해 양적으로 측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방사선은 라드, 전기는 볼트로 측정되지만 정신 에너지는 심리적 작업을 수행하는 현실적 또는 잠재적 힘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리비도를 안정시키는 방법
리비도를 안정적으로 전진시키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두 기능 이 경우에서는 감정과 생각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 생각과 감정은 서로 영향을 주는 상태가 되어 정신 기능의 발달이 무너지는 일을 막아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정신 에너지는 질서를 잃고 두 대립물을 조정할 수 없다. 이때 만일 퇴행 과정이 갈등을 지지하지 않으면 대립물의 투쟁은 끝을 모르고 이어질 것이다. 퇴행은 리비도의 후퇴 운동을 말한다. 대립물은 갈등을 겪고 상호작용을 거듭하면서, 퇴행에 의해 서서히 그 에너지를 잃는다. 탈력화된다고도 말한다. 전진은 정신요소에 에너지를 채우지만 퇴행은 정신요소에서 에너지를 빼앗는다. 이 위기를 겪는 동안 대립물은 퇴행을 통해 가치를 잃고, 대신 새로운 기능이 발달한다. 새롭게 발달한 기능은 처음에는 의식 행동에 간접적으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새로운 기능은 사고인데 그것이 감정을 대신하려다가 퇴행 덕분에 활동이 시거진 형태로 표현된다.
사고는 의식에 도달하면 어느 정도 위장되고 낯설고 또는 음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린다면 깊은 곳에 진흙으로 덮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깊은 곳은 사고 기능이 떠오르기 전 있던 무의식 상태를 말한다. 감정이 상위 기능을 차지할 때는 모두 이기 능으로 집중된다. 즉 모든 요소는 사고 기능과 다른 기능과의 상호 작용에서 신중하게 제외되어 있었다. 때문에 사고 기능이 발달할 기회가 없었다. 퇴행으로 인해 무의식적 기능이 활동하면 그 새로운 기능은 외적 적응이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새로운 기능이 일단 최초의 적응을 달성하면 리비도의 전진은 다시 시작된다. 하루하루 전진에 의해 전에 있던 감정의 지향이 확실해지고 안정된 상태로 발전되듯, 새로운 사고의 지향도 확실감과 안정감을 발전시킬 수 있다. 적응이 필요한 이유가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 내적 정신계에도 적응해야 한다. 감정이 상위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지향은 생각의 입장에 서 있다.
처음에는 이것만으로 충분할지 모르지만, 늘 그런 식으로 해서 잘되지 않기 때문에 감정 기능의 협조도 필요로 한다. 사고는 의식에 도달하면 어느 정도 위장되고 낯설고 또는 음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린다면 깊은 곳에 진흙으로 덮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깊은 곳은 사고 기능이 떠오르기 전 있던 무의식 상태를 말한다.
감정이 상위 기능을 차지할 때는 모두 이 기능으로 집중된다. 즉 모든 요소는 사고 기능과 다른 기능과의 상호 작용에서 신중하게 제외되어 있었다. 때문에 사고 기능이 발달할 기회가 없었다. 감정 기능이 우위를 차지하는 동안 사고 기능은 쓰이 지도 훈련되지도 않은 미분화인 상태로 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적응해서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경우도 환경의 다양한 조건들에 적응하고 있을 때뿐이다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적응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어, 한쪽을 소홀히 하면 반드시 다른 쪽도 해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현대 생활에서는 내적 적응 없이는 외적 적응도 이룰 수 없다는 점이 무시되고 외적 적응만 중요하게 여긴다. 전진도 퇴행도 본질적으로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융은 퇴행이 유익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많은 민족적 지혜를 포함하고 있는 태고 유형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 민족적인 지혜로 인해 인간은 현재 상황에 직면한 긴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정신에너지 퇴행의 중요성의 예
예를 들어, 인간은 절망적 상황에 닥치면 영웅의 태고 유형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융은 가끔 은퇴나 후퇴의 시기를 갖기를 권했는데 이는 삶에서 겪는 여러 문제들을 회피하기 위함이 아닌 무의식에 저장된 새로운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사실 우리가 밤마다 잠들 때도 그렇다. 잠은 무의식 속으로 내려가는 기회이자 무의식이 꿈에 나타나는 기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자기의 꿈에 내재되어 있는 힘과 지혜들에 충분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 융은 전진과 발달을 헷갈리지 않도록 강조한다. 전진은 에너지 가 흐르는 방향이며, 발달은 여러 구조의 분화 개성화를 뜻한다. 퇴행과 전진은 마치 밀물과 썰물 같다. 여러 구조에 전진과 퇴행이 여러 구조에 영향을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발달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전진과 퇴행은 겉으로는 외향과 내향적인 면이 비슷해 보이지만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전진이나 퇴행은 각각 외향적인 형에서도, 내향적인 형에서도 생길 수 있다. 전진과 퇴행은 정신의 형식적 구조나 요소가 아닌 에너지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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